흥미로운 직업 세계
직업인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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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크넷이 만난 사람들
- 극지과학자 이유경
지구의 끝에서 미래를 연구하는 과학자
남극과 북극은 지구 기후시스템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극지의 기후는 지구 전체의 기후에 많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미래 기후변화를 아는데 중요한 연구대상이다. 더욱이 사람의 영향이 적고 지구상에서 기후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해서 좋은 연구환경에 속한다. 이곳에서 극지과학자 이유경 박사는 남극과 북극이 과거에 어떤 곳이었고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지를 연구한다.“극지연구소에서는 육지를 연구하는 지질학자, 대기를 연구하는 대기과학자, 바다를 연구하는 해양학자, 생물을 연구하는 생명과학자 등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이 모여 극지 환경을 연구합니다. 저는 2003년부터 매년 북극을 방문해 북극 툰드라 생태계가 기후 변화로 인해 어떻게 변하는지, 빙하가 사라지고 새롭게 드러나는 육상생태계가 어떻게 변할지를 연구하고 있습니다.”
이유경 박사는 현재 국제북극과학위원회 실행위원, 국제 연구동토층협회 한국대표를 맡아 북극과 관련된 국제기구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일에도 동참하고 있다. 일반인들에게 북극을 알리기 위한 책을 쓰고 북극지식센터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어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북극지식센터에서는 북극에 대한 일반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북극과 관련된 소식과 연구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이유경 박사가 과학자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중학교 때였다고 한다. “우연히 과학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학년 때부터 수업이 끝나면 매일 실험실에 가서 실험을 했는데 3년 동안 중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실험을 하면서 과학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과학이 재밌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고 열심히 공부했죠.”서울대 생명과학부에 입학한 뒤에는 너무나 뛰어난 친구 틈에서 방황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분자세포생물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홍조류의 성(性)분화에 관련된 유전자를 찾는 연구도 수행했다.
“홍조류를 연구하다 보니 해양생물을 연구하게 됐고 해양생물에 대한 연구는 박테리아 연구로 이어졌어요. 그리고 극지연구소로 오면서 극지의 미생물을 연구하게 되었죠.”
극지에서의 일과는 매우 빡빡하고 부지런하게 진행된다. 극지로의 출장기간은 대개 2~3주 정도인데, 연구에 효과적인 시기에 현장을 방문해 아침 9시부터 5시까지 현장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샘플을 채취하고 돌아와서는 저녁식사 후 연구에 용이하도록 밤 12시까지 샘플을 정리한다. 사람들은 북극이 바다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연구를 위해 가능 곳은 툰드라 육지여서 원주민들도 살고 있다고 한다.
“제가 가는 툰드라 육지는 겨울엔 굉장히 춥지만 여름엔 0도~5도 정도로 견딜 만합니다. 북극에 갔을 때 가장 겁나는 존재는 북극곰이었는데요, 다산기지 근처에 곰이 자주 나타나고 사람이 죽기도 했습니다. 곰에 대비해 총기 훈련도 받았습니다. 기지가 없는 곳에서는 연구자들이 용변을 보는 것부터 물을 마시는 것, 토양샘플을 보관하는 것까지도 어렵습니다. 하루 종일 추위에 떨며 딱딱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는 날도 다반사입니다. 보트가 없어서 현장에서 채취한 무거운 토양 샘플들을 등에 지고 숙소까지 한 시간 이상 걸어올 때도 있습니다. 극지의 극성 모기들에 시달리는 것은 일상입니다. 모기들이 많이 나오는 날에는 양봉장 모자를 쓰고 다닐 정도죠.”
이유경 박사는 여전히 연구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적극적으로 찾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생태계 전체를 연구하다보니 통계학이 필수가 되었고, 생물학에서 빅데이터를 다루는 게 매우 중요해져서 통계학과 컴퓨터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한다.“무슨 일이든 목표가 생기면 그 목표를 이룰 때까지 최선을 다 합니다. 예를 들어, 북극지식센터라는 사이트를 만들 때도 어린이부터 과학자, 정책관계자 등 어느 누가 들어와도 자료를 가져갈 수 있도록 정성을 들였습니다.”
남들이 몰랐던 것을 새로 발견할 때 느끼는 보람은 어떨까? 오랜 연구활동에도 여전히 새로운 것을 알아가는 기쁨은 보람으로 이어진다.
“저 역시 남들이 몰랐던 것을 새로 발견할 때 가장 보람을 느낍니다. 다산기지에서 여러 가지 미생물들을 배양하다보면 알려지지 않은 미생물을 발견하게 되고, 그때 다산이라는 우리 이름을 속명으로 붙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속을 만든 것이죠. 그럴 때 정말 기쁩니다. 새로운 사실을 논문에서 읽으면서 자연을 이해하게 될 때도 재밌습니다. 극지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이 저에게는 모두 관심사죠.”
우리나라는 북극권 국가가 아니어서 아직까지는 북극에 관한 연구를 이끌어나가는 수준은 아니다. 다른 나라에 비해 연구자 수도 적고 상주하는 연구자도 없다.
“봄에는 대기팀, 여름에는 생태계 생물 연구팀, 가을과 겨울에는 고층대기 연구팀이 때에 맞춰 방문합니다. 출장비가 많이 필요하기 때문에 연구과제가 있어야만 다산기지에 갈 수 있지요.”
그래도 우리나라는 최근 북극이사회나 북극과학위원회와 같은 조직에서 핵심적인 일을 맡고 있으며, 미국, 일본, 러시아, 노르웨이 등의 북극 연구 선진국들과 공동 연구를 진행하기도 하다.
“북극은 색다른 환경 속에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재미있는 곳입니다. 인구밀도가 매우 낮은 곳으로 개발과 관광 등 일을 해줄 사람이 많이 모자라죠. 예를 들어, 땅이 녹고 있어 도로와 건물 등의 안전을 위한 연구가 필요하고, 허브공항을 세우기에도 좋은 지리적 위치입니다. 과학자가 아니더라도 외교, 경제, 탐험, 환경보호, 건축 등 사회 모든 분야에서 극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미래를 설계할 때도 한반도에만 국한하지 말고 남들이 가지 않는 극지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좋은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극지과학자로 활동하는 데 가장 중요한 능력과 자질은 무엇일까? 추위에 강해야 하는 중요한 능력이 될 수 있을까?
“극한 생활에서 오랫동안 씻지 못하고 추운데서 고생할 때도 많아서 자연을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연구자로서 궁금한 점을 풀어보려는 노력과 호기심이 필요하죠. 왜? 라는 질문을 항상 던지고 성실하게 답을 찾아가는 사람이라면 좋은 극지과학자가 될 수 있을 겁니다.”이유경 박사의 과학자로서 최종 목표는 우주에도 생물이 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동토 북극을 연구하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화성을 연구하고 싶다고 한다.
“화성에 과거 외계 생명체가 있었다면 최소한 땅속에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요? 극지연구가 그런 궁금증과 아주 관련이 깊습니다. 산소와 물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화성과 극지는 추워서 얼어있는 동토라는 점에서 매우 비슷합니다. 그 동토를 뚫어 샘플을 채취한 뒤 미생물 등을 조사하는 방식은 같지요. 미국항공우주국(NASA)에서도 조만간 화성에서 토양을 파서 흙을 가져오는 프로젝트를 진행할 텐데 그 샘플을 저도 분석해 보고 싶습니다.” 앞으로는 다른 나라 과학자들에게 한국에서 하는 연구를 널리 알릴 수 있도록 교류하는 시간을 갖고 싶다는 이유경 박사. 더불어 은퇴 후에는 교육과 관련된 봉사를 하며 이웃과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는데 기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극지연구소에서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21세기 다산 주니어 프로그램’은 전액 연구소 지원으로 현장에 나가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지원하려면 실험계획서를 써내야 하는데 이 자체가 굉장한 공부가 된다.
“과학자가 되고 싶다면 아주 쉬운 실험이라도 직접 해보기 바랍니다. 직접 실험하고 싶은 주제를 찾아보고, 실험을 준비하고, 실험을 하고, 실험 결과에 대해 생각해 보고, 결과보고서까지 써보면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제가 과학자가 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자신감과 도전입니다. 누구나 각자의 재능이 있습니다. 자기 속에 장점을 자꾸 격려해주면 잠재력이 자라납니다. 돌이켜보면 여기까지 계획을 세우고 온 것은 아닙니다. 해조류, 미생물, 생태학까지 잘 모르는 분야를 공부해야 할 때 ‘일단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도전해왔습니다. 도전에 익숙하지 않다고 미리 포기하지 말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도전하면서 스스로의 인생을 만들어 나가기 바랍니다.”
<주요 직업 정보>
극지과학은 특정 학문 분야가 아니라 극지라는 지역이 연구대상이다. 때문에 지질학, 생명과학, 대기과학, 해양과학, 환경공학 등 다양한 분야의 자연과학과 공학 전공자가 활동할 수 있다. 극지과학자가 되려면 박사학위 또는 동등 수준 이상의 자격이 필요하며 다양한 연구에 참여해 관련 논문을 저널에 제출하는 등 연구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극지과학 관련 연구소로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부설 극지연구소가 있다. 극지연구소는 남극세종과학기지, 남극장보고과학기지, 북극다산과학기지, 쇄빙연구선 아라온 등 남극과 북극의 대형 극지 인프라를 갖추고 다양한 연구를 수행한다. 극지는 매우 춥기 때문에 현장 연구는 대부분 늦봄부터 여름, 가을철에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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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장년 창직자 인터뷰
- 프리마켓기획자
소중한 재래시장을 만드는 기획자
김성규 | 창직아이템 :프리마켓 기획자
프리마켓을 기획하는 일... 어떤 일인지요?
흔히 마켓이라고 하면 마트나 가게를 떠올릴 수 있지요. 제가 생각하는 프리마켓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오픈형 마켓이나 시장입니다. 유럽의 벼룩시장처럼 거리에서 특별한 아이템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곳이지요.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장소섭외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곳이 바로 재래시장입니다. 현재 전국에는 1,500여 개의 재래시장이 있고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주요 시장만 해도 600~700개에 이릅니다. 최근 재래시장이 현대화되고 하드웨어는 많이 변했지만 소프트웨어는 부족합니다. 재래시장의 상가를 임차하여 그 가게에서 기획전도 열고 이것을 SNS을 통해 홍보해주고, 매출을 올리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것이지요. 저희가 직접 가게를 임차하여 운영할 수도 있고, 혹은 다시 가게를 일시적으로 필요로 하는 분들께 임대해 주는 것도 기획하고 있습니다. 재래시장이 좀 더 활성화되면서 신선한 아이템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것에 기여하고 싶습니다.프리마켓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있으신지요.
원래 예전부터 막연하게나마 생각해왔던 아이템입니다. 대기업에도 다녔었고 여러 비즈니스를 해본 경험이 있습니다. 온라인 판매경험도 있었는데 이때 반품물건을 처리하기 위해 프리마켓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현재도 이베이와 함께 영업하는 온라인몰을 운영중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소 생소한 분야여서 구체화시키질 못하다가 창직 아카데미에 참여하면서 좀 더 아이템을 좁히고 구체화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같이 참여한 분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것도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재래시장분들을 잘 설득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재래시장 안에서 튀는 것에 거부감이 있지는 않을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창직을 위해 그동안 준비는 어떻게 하셨나요?
다른 기관의 프리마켓 기획자 과정에 참여하면서 같은 고민과 관심을 갖고 있는 분들을 만난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서울시의 창직 아카데미에 참여한 것도 저의 아이디어를 사업화하고 구체화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강의만 듣는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막상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려니까 어려움이 있더군요. 그래서 다양한 직업을 알고 찾아보고 해외 직업도 찾아 견문을 넓히려고 했습니다. 저희 세대가 알고 있는 직업분야가 제한적이다 보니 창직을 하려해도 영 감이 잘 오지 않았습니다. 창직만 추구하다 보면 뭔가 새로워야한다는 것에만 집착하기 쉬울 것 같더라구요. 그래서 다양한 직업을 알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향후 계획은 어떠신지요.
우선 서울, 경기를 시작으로 할 예정입니다. 재래시장 기획을 준비하면서 당장은 백화점 꼭대기층을 빌려서도 프리마켓을 운영하는 것을 준비하려고 합니다. 물론 재래시장과 백화점은 구매계층도 다르고 특징도 다르지만, 둘 다 ‘기획’에 승부를 걸려고 하기 때문에 저의 기획력을 시험해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상관없다고 봅니다.
시도나 의도가 좋다는 생각은 들지만 솔직히 프리마켓 운영으로 큰 수익이 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프리마켓 창직자를 키우는 일도 동시에 하려 합니다. 창직 모델을 만드는 것이지요. 현재 U.F.O라는 프리마켓 기획자들이 모인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30대부터 50대까지 프리마켓에 관심있는 11명이 모여있습니다. 아이디어도 공유하고, 어떤 사람은 기획에, 어떤 사람은 판매에 관심이 있기도 해서 다양한 관심사를 통해서 시너지도 발휘되고 있습니다.
프리마켓은 기획과 아이템선정이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니즈를 잘 파악하는 것도 필요하고, 사람들의 타겟에 맞는 아이템을 잘 선정하고 홍보도 잘 해야겠지요.창직을 준비중인 중장년층에게한마디 전하신다면?
나이든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하다보니 실현가능성이 높은 것을 찾으려 다니려고 하고 새로운 것에는 거부감이 있기도 하지요. 또 중장년들은 리스크를 우려해서 의사결정을 하기도 어렵고요. 하지만 창직은 오히려 중장년층에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시간이 걸리므로 긴 호흡으로 느긋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발명을 한다는 생각으로 여러 아이템을 골라 고민해보고 시행착오를 하는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실패도 좋은 경험이므로 여러 시도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창직을 준비하다보니 사고의 폭이 넓어진 걸 느낍니다. 예전에는 기획아이템을 찾다가 다른 누군가가 하고 있으면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어떻게 나만의 것으로 변화시킬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하지 않는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차별화된 나만의 것을 만드는 것이 창직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 아무래도 본인의 경험과 관련있는 분야에 창직하는 것이 좋습니다. 간혹 완전 새로운 분야로 창직을 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무래도 더 힘들고 어렵습니다. 본인의 노하우와 경력을 믿고 그 안에서 창직을 해야 결과물도 좋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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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창직자 인터뷰
- 소셜데이팅코디네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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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는 일(사업)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
‘이음 ’은 매일 낮 12시 30분, 20~30대 싱글남녀에게 하루에 한 명씩 운명의 짝을 소개해 주는 새로운 컨셉(=소셜데이팅)의 온라인데이팅 서비스입니다. 2010년 세계 최초로 ‘소셜데이팅’의 개념을 도입했으며 국내에 소셜데이팅 붐을 만들며 지금은 업계 1위로 성장했습니다. 설립 2년 만에 40쌍에 달하는 결혼 커플을 탄생시켜 주목을 받았으며, 현재까지 회원 수는 35만 명, 누적 매칭 성공 건수는 28만 쌍에 이릅니다.
사업아이템의 가치를 인정받아 실리콘밸리에서 20억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기도 했으며, 제 11회 여성창업경진대회 대상, 제6회 인터넷대상 국무총리상, KOTRA [나는 글로벌 벤처다 2012] 콘테스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이음’ 등장 전까지 국내에는 대학생에서 사회 초년생(20~30대)이 신뢰를 가지고 이용할 만한 소개팅의 주도적인 브랜드가 없었습니다. 크게 결혼정보시장과 ‘일회성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음란성채팅시장으로 양극화된 상황이었죠. 특히 음란성채팅사이트 위주의 국내 온라인데이팅 서비스들은 공통적으로 ‘무제한 회원 검색, 무한정 데이트신청’을 제공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들 브랜드는 개인정보의 과잉노출과 깔끔하지 못한 구성으로 여성들에게 거부감을 형성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했고, 결국 브랜드화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이음은 기존에 없던 하루에 한 명이라는 컨셉과 운명을 강조한 스토리텔링, 자신의 취향과 선호도를 TAG(키워드)형태로 입력하는 모바일 최적화 데이터구조, 여성에게 신뢰와 호감을 얻는 인터페이스(검색불가!), Push형 서비스(한 번만 데이터를 입력하면 유저가 할 일은 zero)와 같은 차별점을 통해 런칭할 때부터 지금까지 2년에 걸쳐 온라인데이팅 서비스 분야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처음 어떻게 이 아이디어(일)를 생각하게 된 건가요?
- 처음부터 창업에 큰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사람들의 행동을 바꾸는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컸습니다. NC소프트에 근무하고 있던 시절에 같은 뜻을 가진 지인 한 분을 만나 의기투합하게 되었고, 파트타임으로 서비스를 개발해주는 친구들 3명의 도움을 받아서 서비스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습니다. 그 때가 2010년 3월 무렵이었습니다.(이후 2010년 5월에 OBT 버전을 출시했습니다.) 사실 실행에 옮길 수 있었던 것은 직장 입사 초기의 경험에서 어느 정도 확신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학교 다닐 때 소개팅을 정말 많이 한 편이었고, 직장에 들어가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직장에 들어가니까 소개팅을 시켜주겠다는 사람도, 누군가를 만날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을 텐데 왜 소개팅을 연결해주는 서비스가 제대로 없는 거지?’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창직 아이템의 시장성은 어떻게 파악하였나요?
- 엔씨소프트 사업팀에 근무하며 해외 서비스 동향을 살펴보던 중 온라인데이팅 시장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하게 됐습니다. 또 스마트폰으로 인해 SNS가 급성장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지금이 이 시장을 활성화하는 데 적기라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도전하게 됐습니다. 경험이 없었으니 무서운 줄 모르고 용기 있게 시작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만남 서비스가 레드오션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음란성 온라인 채팅 서비스와 결혼정보업체만 있을 뿐, 그 사이의 ‘가볍고 밝은 소개팅’에 대한 온라인 사업은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틈새시장을 개척해 블루오션에 발을 들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온라인 데이팅시장은 4조원 규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도 승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본인의 능력, 지식, 대학의 전공은 창직과 연관성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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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를 졸업했는데 학창시절부터 ‘채널’에 대한 관심이 무척 많았습니다.
똑같은 사람을 상대하는데도 메일, 전화, 문자와 같이 채널이 바뀌면 대화양식이나 대화내용이 달라지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채널’을 연구하고 싶은 마음에 이를 이론적으로 공부하는 커뮤니케이션학부터 미대 미디어 프로그래밍, 정신분석학까지 과나 학점에 상관없이 다양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또한 정보문화학이라는 연합전공을 전공한 것이 지금의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게임이나 미디어아트를 만드는 데 컴퓨터 공학과 친구들이 개발하고 디자인과 친구들이 디자인하고 저는 기획을 맡았습니다. 이때 새로운 채널에 대한 호기심이 더 많아졌습니다. 이음 또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새로운 채널이라는 측면에서 제가 가진 호기심과 맞닿아 있었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이음’으로 연결된 것 같습니다 - 창직 준비 과정에서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 초창기에는 같이 사업을 시작한 친구들끼리 사비를 털어서 진행하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엔젤투자자들을 구한 덕분에 그 이후로는 자금 압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 (초기 모델을 시연하고 몇 천만 원 정도의 자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그 후 2010년 여성창업경진대회 대상을 수상하게 되면서 언론에도 많이 소개가 되었고 1,000만원이라는 창업자금도 지원받게 되어서 수월하게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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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직아이디어 도출 후 창직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해주세요. -
퇴사 이후 서울대 동문 친구들과 함께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한 회사 사무실을 임대해 사업을 시작했었습니다. 책상 2개, 컴퓨터 2대로 시작한 사업이었습니다. 처음엔 저를 포함해 3~4명 정도가 학원 사무실 일부를 빌려 비는 시간에 모여서 일했습니다. 모바일 환경에서 각자에게 맞는 상대를 찾을 수 있는 로직을 만들고 프로그램화 하는 과정에서 두 번의 고비가 있었습니다.
시범서비스가 끝나고 유료화를 해야 할 시점인데 주변에서 앞서 프리챌 등 유료화를 시도했다가 주저앉은 예를 들면서 부정적으로 봤습니다. 각자 주머니를 털어 일하는데 한계가 왔기 때문에 동시에 투자자도 물색해야 했습니다. 금융가를 돌면서 여러 차례 미팅했고, 한번 실패할 때마다 그들이 지적했던 것, 궁금해 했던 점들을 보강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초기 창업자금은 엔씨소프트를 다니기 전 벤처인들의 모임에서 만난 고영하 ‘고벤처’ 대표의 주선을 통해 9,000만원의 자본금으로 출발했고 사업 중간 중간에 증자를 했습니다.
서비스적으로는 이음이라는 서비스에 대한 구상과 성공에 대한 확신은 있었지만, 프로그램 개발과 데이터 관리 등 여러 가지 문제에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초기 개발자들과 의견 조율을 제대로 하지 못해 사이트 론칭 시기가 두 달 넘게 미뤄지기도 했습니다. 서비스를 앞두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하지 않고 무조건 출범 날짜를 받았던 게 실수였습니다. 이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나서 자연스럽게 개발 뿐 아니라 경영, 마케팅, 인사 등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더 공부했습니다. - 창직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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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음 회원가입 절차는 생각보다 까다롭습니다.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음신국에 입국할 수 없습니다. 우선 자신의 기본정보 입력은 필수이고 이어 이음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프로필 작성입니다. 필수 키워드는 성격/캐릭터, 취미, 외모, Place, I Like, I Have, I Want 등 7개, 선택 키워드는 출신학교와 직업 2가지입니다.
여기에 회원 검색 자체가 불가능하고 운영자가 헤게모니를 가지고 있는 푸시형 서비스라는 점도 믿음을 줍니다. 운영자가 하루에 한 명씩 매칭해주는 사람 외에는 다른 사람의 정보를 이용자가 직접 확인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정보가 함부로 공개되지 않는 점이 온라인 데이팅의 위험성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고 개인 신상이 함부로 노출되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에 기존의 온라인 만남보다 믿을 만합니다. 또 가입 절차가 까다로운 만큼 가벼운 만남보다 자신의 이상형을 만날 확률도 높아 회원들이 만족해하고 있습니다.
이음은 현재 40만 명의 회원이 등록되었고 월 매출은 약 2억 정도입니다 아직 '성공'이라는 마침표를 찍기는 이르지만, 그렇다고 적은 수준은 아닙니다. 이 수준에 오르기까지 많은 어려움과 시행착오도 겪었습니다. 이처럼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지만 자신에 대한 믿음과 목표를 잊지 않고 끈질기게 노력한 결과 만들어진 게 바로 이음입니다. 그만큼 이음에 대한 기대도 높습니다. 현재 이음의 직원 수는 40명입니다. 정직원 2명, 파트타임 3명으로 다른 회사의 사무실 한편에 책상 몇 개를 빌려서 시작했던 것에 비하면 덩치가 많이 커졌습니다. 회원 수 100만 명 정도가 되면 이제 한 단계 뛰어 넘었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음소시어스의 최종 목표가 전 세계에서 사람과 사람을 가장 잘 연결해주는 회사가 되는 것인 만큼 한 단계 성공했다고 여기는 시점은 100만 명을 넘어 섰을 때일 듯합니다.- 창작아이디어 도출 후 창직에 이르기까지 어려움이 있었다면?
- 초창기에는 같이 사업을 시작한 친구들끼리 사비를 털어서 진행하느라 많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엔젤투자자들을 구한 덕분에 그 이후로는 자금 압박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질 수 있었습니다(초기 모델을 시연하고 몇 천 만원정도의 자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그 후 2010년 11월말에 정식 런칭을 했는데 런칭 1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는 성과를 냈습니다. 그 덕분에 실리콘밸리에서 20억 이상의 투자금도 유치했습니다.
투자자금 유치의 노하우는 특별히 없습니다. 현재의 수치를 잘 관리하고 검증 받아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비전이나 경영진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항상 이런 부분들을 주시하고 그 속에서 인사이트를 찾아 개선하고 비전을 세우는 것에 주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창직 과정에서 잊지 못할 경험이나 에피소드가 있다면?
- 창업 초기 개발자들과 의견 조율을 제대로 못해 사이트 런칭 시기가 두 달 넘게 미뤄진 적이 있는데 그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어떤 서비스를 할 때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지 계산을 못하고 무조건 출범 날짜를 못 박아 뒀던 것이 실수였습니다. 그 때 이후로 개발뿐만 아니라 경영, 마케팅, 인사 등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더 공부하게 됐습니다. 투자를 유치하려면 사업 현황과 관련된 수치를 잘 관리하고 검증 받는 게 중요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비전이나 경영진의 의지를 증명하는 것도 필요하고요. 그래서 항상 이런 부분들을 언제나 주시할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인사이트를 찾아 개선하고 비전을 세우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창직 과정에서 제3기관, 인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면?
어떤 인물, 어떤 기관, 어떤 내용인가요?
- 초기에 한국벤처캐피탈협회가 우수 중소기업에 주는 ‘벤처투자기업’ 인증을 받았습니다. 또 여성창업 경진대회에 수상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국내외 투자자들이 연락을 해왔고 이를 통해 수월하게 기관투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의 약점(경험)을 보완해주는 것은 풍부한 경험을 가진 주주 및 고문진입니다.
고영하 고벤처 회장이 주주이자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고벤처포럼은 10여명으로 시작해서 지금은 한 회에 300명씩 참석하는 대규모 모임이 되었습니다. 그만큼 창업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고벤처포럼을 많이 찾고 있으며 고벤처포럼이 창업 붐에도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스타트업 기업들에겐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과 정보, 네트워크 등이 절실한데요, 이런 목마름을 채워주는 곳이 바로 고벤처포럼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이음 역시 고벤처로부터 단순히 금전적인 투자만 받은 것이 아니었고 인력 소개에서부터 사무실 및 관련업체 담당자 소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 있는 좋은 분들과의 네트워크 및 정보를 지원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는 창업 초기에 회사를 꾸려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창직인이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가 있다면?- 확실히 예전보다 벤처회사를 시작하기 좋은 환경인 건 맞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시작하는데, 결국은 끈기인 것 같아요. 어떤 서비스가 출시하자마자 성공할 확률은 적습니다. 그래서 끈기가 제일 중요할 것 같습니다. 열정은 창업하는 사람이라면 너무나 당연하고 그 열정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끈기있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 롤모델이 있나요?
- 물리학자 리처드파인만과 버진인터랙티브의 리처드브랜슨을 존경합니다.
-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 창직 전선에 들어선 저에게 ‘안락함’이라는 단어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안정된 서비스를 만들어 내기 위한 사업기획은 물론, 이음만의 문화를 담은 스토리텔링, 서비스를 온라인상에서 구현해내는 유능한 개발자를 찾아 개발자와 함께 밤을 새워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물론, 직원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한 노력까지 어느 것 하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부분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만족감에 더 큰 꿈을 꿀 수 있는 용기와 열정을 채워가고 있죠. 저는 문화, 예술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음의 성공적인 경영을 통해 현장경험을 쌓아 언젠가는 우리나라 문화, 예술분야의 저변을 확대하고 성장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 꿈은 문화예술분야 사업가로 혹은, 문화, 예술의 정책을 관장하는 수장이 되어 실현시켜낼지 아직은 미지수이지만, 어떤 자리에서 무슨 일을 하건 제가 이뤄내고자 하는 목표는 어린아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일상의 삶 속에 예술의 향기를 향유하며 행복하게 사는 삶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후배에게 전하고 싶은 말?
- 물론 창직은 고되고 힘듭니다. 대신 그 외에 떨어지는 가치들이 엄청나게 많지요. 주말까지 일 생각을 해야 할 정도로 바쁘지만, 일반 회사를 다닐 때보다 체감 노동은 오히려 적습니다. 자기가 주체가 되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사무실 분위기를 내 뜻대로 활기차게 가져갈 수 있는 그런 행위는 ‘그 자체로 일에 대한 보상’입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고, 그만큼 크게 성장하실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딱 한 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꾸준할 것’입니다. 열정과 톡톡 튀는 사고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20대의 매력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놀라지 않고 꾸준히 가는 것’은 20대에게 부족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를 지속적으로 상기하면서 열심히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창직을 준비하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끈기’를 가져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20대는 그 어떤 시기보다 열정과 패기로 뭉쳐있는 나이이고, 그것을 자산으로 창직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열정에 쉽게 지치지 않고 일을 밀고 나가는 ‘끈기 있는 태도’까지 가지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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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직 성공기
- 난독증전문가
김은희 | 한국난독증 연구소 대표
은희야, 넌 이렇게 살 애가 아니야...
제가 대학을 다니던 80년대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강의실에서 공부만 하기에는 불편한 시대여서 동아리회장, 학교 대표로서 많은 활동을 하다 보니 전공에 대한 깊은 지식을 쌓을 수가 없었고 불문학 전공으로 취업을 할 만한 마땅한 곳이 없었습니다. 대학졸업 직후 바로 결혼해서 1남 1녀를 낳고 아파트 평수 늘리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아줌마로 살아가던 그러던 어느날, 대학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모처럼 집에 놀러왔는데 계속 해서 쉬지 않고 해대는 시댁과 자식이야기, 아파트나 땅 이야기, 그러다가 왠지 우울하고 화가 많이 난다는 나의 말을 아무 말 없이 듣더니 내 손을 꼭 잡고 “은희야, 너는 이런 애가 아니야, 너는 이렇게 살 애가 아니야” 진심으로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말하는 친구를 보며 순간 부끄러움이 확 몰려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아니야, 이런 모습은 진짜 나의 모습이 아니야, 20년 후 분명 나의 모습에 실망을 하고 우울해 질거야, 하지만 아이들이 이제 4살, 8살인데 내가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뭘 해보려고 해도 돈도 없고....
친구를 만난 그날부터 ‘나는 누구일까? 나의 예전 모습은 어땠을까?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현재의 나의 모습이 내가 나이 들어서도 만족스러울까?’ 등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신문기사를 보았는데 미국에는 언어치료사가 활발한데 국내에는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순간 머릿속으로 빛이 반짝이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래 이거야 내가 언어에는 좀 소질이 있잖아, 가르치는 것도 좋아하고, 내가 대학 때 그렇게 소외계층 어쩌구 했는데 이런 소외받는 장애아들을 치료 한다면 좋겠구나 그리고 아직 이런 직업군이 없다고 하니 앞으로 전망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언어치료사, 사회복지사, 임상심리사,그리고 난독증 전문가가 되기까지...
1994년쯤 신문기사를 통해 발달장애아치료전문가 과정이 생겼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강좌를 들으면서 언어치료사도 별도로 취득하고, 평생교육원을 통해 사회복지사도 취득하고 건강가정사도 함께 취득하였습니다. 상담을 하다보니 심리학이 반드시 필요했고, 다시 평생교육원의 학점은행제 심리학과정을 등록하였습니다. 심리학 공부를 하면서 나의 문제의 원인에 대한 통찰을 하는 시간을 가졌고 아동과 부모의 심리에 대하여 좀 더 전문적으로 상담을 하게 되었으며 임상심리사 시험에도 합격하여 심리 전문가로서의 자신감이 커지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20여 년간 발달장애, ADHD, 학습장애 등을 치료하면서 아무리 열정을 다해 가르쳐도 좋아지지 않는 아이들을 보며 좌절감을 느끼던 중 많은 학습부적응 학생들의 문제가 단순히 게으르고 산만하고 자기주도적이지 못하고 머리가 나빠서가 아니라 난독증이라는 신경생리학적인 문제로 인해 노력해도 한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학습부진 대책이 있고 엄청난 예산을 쏟아 붓는 데도 해결이 되지 않고, 학습부적응이 학교부적응과 학업중단, 사회부적응으로 연결이 되어 더 많은 사회적 비용이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취약계층에 분포되어 있는 난독증 아이들을 도우려면 정책적 도움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서는 법적 근거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사회전반적으로 난독증에 대한 이해가 없었던 것이 가장 어려워
아직 난독증에 대한 선별조사 조차도 안 되어 있어 난독증 학생들이 얼마나 있는지도 모르고 있고, 엄마들도 단지 공부를 못할 뿐인데 무슨 학습장애라고 못박는 건 아닌지 또는 이름도 생소한 난독증이라는 낙인을 찍는 것이 아닌지에 대해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관련되는 교수들에게도 질문을 했지만 이미 특수교육에서 학습장애 부분으로 하고 있었다 라든지 언어치료에서도 이미 언어문제가 있는 아이들을 치료하고 있는데 굳이 난독증 전문가가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을 표시했고 독서치료를 하시는 분들도 자신들 영역이라고 주장하거나 교육관련 분야의 전문가들도 학습부진이나 이에 따른 학습코칭은 이미 자신들이 해오던 분야라고 주장하여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에 굴하지 않고 그분들의 이야기를 통합하고, 그에 따라 난독증 학생들을 돕기 위한 법률적 근거를 만들고 난독증 바우처를 만들어 난독증 전문가가 일할 수 있는 장을 만들었으며 교육청별로 난독증 선별 및 심화검사를 할 수 있게 지속적으로 교사, 학부모, 담당 공무원들을 상대로 인식전환을 위한 교육을 실시해 오고 있습니다. 또한 좀 더 체계적으로 난독증 분야를 전문화시키고 한국적 도구개발도 하기 위하여 뜻을 같이 하시는 전문가들과 함께 난독증 협회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대학에도 난독증 치료학과 개설을 추진하고 있어 앞으로 모든 교육관련 분야에서 난독증 전문가가 일 할 수 있는 많은 장을 만들어 그들이 열심히 일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 할 것입니다.난독증 전문가 역시 끊임없는 공부와 애정이 필요한 직업
저의 경우는 창직에 앞서 우선 배출한 전문가들이 합법적으로 일 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했습니다.
법률과 바우처라는 제도, 교사나 학부모의 인식전환, 교육청에서의 난독증에 대한 인식과 전수조사 및 전문가를 통한 치료방법 모색 등을 할 수 있도록 큰 틀에서 우선 작업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현재는 난독증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져 교육과학부에서 전국 8,500명 대상으로 한 난독증 선별검사를 하였고 이에 따른 전문적 심화검사와 함께 치료를 담당할 전문가가 요구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법률 제정 이후 난독증에 대한 진단도구도 많이 출시가 되고 있고 후속 연구가 뒤따르고 있어서 예전보다 쉽게 진단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난독증 전문가가 되면 난독증이라는 제도와 치료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기 위해서 관련 공무원, 전문가들, 학부모에 대한 인식전환에도 노력을 해야 됩니다. 생소한 개념이라 한 번에 안되면 수회를 반복해서라도 납득하실 수 있을 때까지 설명을 해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난독증 전문가는 언어, 두뇌신경생리학적 지식, 심리 등의 지식이 골고루 필요한 분야입니다. 전문가로 인정을 받으려면 경험과 함께 끊임없이 공부하는 자세와 도와주면 극복이 가능하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난독증 아동·청소년에 대한 애정과 이들을 돕기 위한 열정이 필요합니다.
저 역시 학문에 대한 끊없는 호기심과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돕기 위한 열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난독증 아동의 문제를 훗날 사회적 문제와 결부하여 이해하고 도움을 줘야 된다는 사회적 책임감이 저를 채찍질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많은 일을 해낸 데에는 결코 저 혼자 힘으로는 할 수가 없었는데 관계를 가졌던 학부모들과의 계속되는 교감과 지역사회에서 크고 작은 교육관련 위원회에서 일하면서 다양한 부분의 학생들의 문제와 그 원인을 찾아보는 과정들이 도움을 줬고 여기서 알게 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지지를 해주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많은 경험과 좌절이 창직의 원천
어느 날 혼자 아이디어가 생각나서 단번에 창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경우에는 20여 년 동안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끝없는 의문을 가지고 연구를 한 결과 난독증을 알게 되었듯이 경험과 좌절 등을 통해서 새로운 일에 대한 영감이 떠오른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창직과 확산에 있어 주변의 우호적 지원군을 많이 만들고 함께 해나가야 되며 그동안 해오던 것들의 복제가 아닌 좀 더 창의적이고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개념의 접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쉬지 않고 지속적으로 연구해서 더욱더 발전적인 모습으로 진화를 해야 창직이 자리를 잡고 사회에서 도움이 되는 분야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괴테가 말했습니다. ‘재능은 고독속에서 이루어지고, 인격은 세파 속에서 이루어진다’모든 일은 첫발을 내딛기가 힘듭니다. 하지만 암스트롱처럼 누군가는 좌절과 고독을 이겨내고 첫발을 내딛습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선택하는 그 순간 이루어진다’ 라는 긍정적 마인드로 열정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 개인적 성취가 사회적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을 찾기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