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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업성공수기

취업의 모든 것 취업이야기 취업성공수기

“이번이 마지막”...
간절하니 통하더라

2013년 11월 나는 1년의 계약 기간을 끝내고 구직자가 되었다. 퇴직금과 실업급여, 적게나마 모아두었던 돈을 다 쓰기 전에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며 사회의 일원으로서 소박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건방졌고 어쩌면 경솔한 생각이었다. 나는 모아두었던 적금과 보험금, 퇴직금, 실업급여 모두를 생활비로 다 쓸 때까지 사회의 일원이 되지 못했다. 생활은 규칙적이었지만 남는 것 이 없었고 한가했지만 조급했다.

언제 어디서든 워크넷 ‘새로고침’ 버튼을 누르며 검색

매일 워크넷을 뒤지며 눈을 뜨고 밥을 먹을 때도 화장실에 갈 때도 어디든 이동할 때도 수없이 새로고침 버튼을 눌려가며 내가 일 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모바일 앱이 잘 되어 있었고 즉시 이메일로 지원이 가능했던 것도 한 몫 했다. 기타 다른 구인사이트와 연동이 가능해서 한 번에 채용공고를 볼 수 있었고 검색이 편한 것이 큰 장점이었다.
키워드 검색과 지역별 검색이 다른 사이트에 비해 체계적이였고 고용센터를 통해 인증된 구인공고만 올라오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신뢰도가 높았다. 불건전한 채용공고나 혹은 같은 내용의 구인공고를 단어만 바꿔 여러 개의 공고를 낼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정보만 찾아서 보면 되었다.
특히나 E-채용마당은 구직자인 나에게 노다지 같은 곳 이였다. 신뢰도 높은 기업이나 각 종 공사의 채용 정보를 한 번에 확인할 수 있어 매번 각자의 사이트에 들어가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복되는 ‘이력서 제출-탈락 통보’에 참담

나는 매일 괜찮은 공고가 올라오면 이력서를 제출하고 결과를 기다리고 탈락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매일매일 복권을 사는 심정으로 이력서를 제출했다. 매번 꽝을 확인하는 것은 심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했다.
면접제의가 없었던 것 은 아니다. 몇몇 곳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최종 면접까지 간 경우도 있고 희망적인 뒷말도 여러 번 들었지만 언제나 결과는 참담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족에게도 주변 지인들에게서도 멀어졌다. 부모님은 그럴 때 마다 위로해주셨고 친구들도 잘 될 것이라는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것도 한 두 번이였고 그런 위로는 받는 내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 불편해졌다.
21살 때부터 일찍 경제적으로 자립했던 탓인지 부모님께 손을 벌리기도 난처한 상황이었다. 무작정 놀고 있을 수만은 없어 공부한다는 명목으로 부모님께 짐이 되어야 했다.

잇단 좌절에 사회복지사 꿈 포기

어떤 날은 내가 너무 초라해 시골집에 내려가 밭을 매기도 하고 집안일을 하기도 했다. 밭을 매던 날이면 손이 저려 밤새 끙끙 거리며 잠못이루기도 했다. 애써 내색하지 않았지만 아마 부모님은 알고 계셨을 것이다.
직업상담사, 사회복지사로서 경력을 쌓고 그 분야에서 훌륭한 인재가 되기를 포기한 것이 그 쯤이였다. 작년 7월 나는 현실과 타협했다. 어쩌면 도망치려 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구직자로서 고생했던 경험으로 구직자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회복지서비스가 필요한 대상자에게 알맞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의미있는 삶을 살고자 했던 이상을 포기했다.
시골에 내려가 농사를 짓거나 그 와 관련된 일을 하고자했다.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지원하고 안돼면 농업의 길을 걸으려 했다. 농사일을 우습게 보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만큼 수확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거절당하는 것이 두려워 거절당하지 않는 일을 찾았던 것 같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사회복지사 지원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워크넷 구인공고를 찾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OO사회복지협의체'에서 사회복지사를 구한다는 구인공고를 보았고 2일간 서류를 만들어 제출했다.
나에게는 그것이 마지막 발악이자 희망이었다. 직장에 들어가 야근을 하거나 매일 출근을 하거나 지친 퇴근길에 잠시 차 한 잔을 친구와 마시거나, 부모님께 적게나마 용돈을 드리거나 맛있는 음식을 가족과 먹거나 혹은 직장에 대한 푸념을 하거나 그런 것 들을 하고 싶었다. 나는 그저 내 또래의 다수의 친구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남들이 출근하는 것을 지켜보고 친구들이 직장에 대해 하는 이야기를 그저 끄덕이며 들어줄 수 밖에 없는 내가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다.
벼랑 끝에 서 있었고 나는 그 만큼 간절하고 절실한 상황이었다. 이력서를 넣고 서류합격자 발표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직업상담사 자격증 합격 여부를 확인 할 때보다 더 긴장했던 것 같다.
서류전형 결과가 발표되고 합격자 명단에 있던 내 이름을 보는 순간 그 때 그 기분은 설명할 수 없었다.

철저한 면접 준비... 현장에선 간절함 호소

합격결과를 부모님께 알리고 면접 준비를 시작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없던 힘도 나고 긍정적인 것들만 보였다. 광산구 지역사회복지협의체가 어떤 일을 하는지 최근 광산구의 핫 이슈는 무엇인지 하나 하나 공부하기 시작했다.
면접장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나는 잘 할 수 있다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서 웃으면서 인사하고 차분하게 자리에 앉아 면접관들과 눈 인사를 하고 절대 긴장한 티를 내지 말자’ 끊임없이 생각했다.
면접장에 들어서서는 나의 간절함을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단어를 동원했다. 면접을 보는 동안 나는 이 면접을 위해 많은 시간과 공을 들였다는 것을 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내가 이 회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직장을 얼마나 간절하게 원하는지 떨리지만 절실하게 말했다. 지금은 면접관님들과 웃으며 전화하고 인사하는 사이지만 그때는 모두가 시어머니같았다. 그들의 눈을 보며 외우고 읽고 깨달았던 모든 것을 쏟아 내었다.
반응은 괜찮았다. 슬쩍 슬쩍 면접관님들과 눈을 마주치며 어색하게 웃으면 면접관님들도 날 향해 웃어주셨고 내가 하는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셨다. 공부하고 노력한 시간이 빛을 보는 순간이었다. 떨었지만 절실한 면접이 끝나고 문을 닫고 나오면서 어쩌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좌절의 경험이 많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합격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어느 정도 했던 것 같다. 면접당일 저녁 나는 그 확신을 합격전화를 받음으로써 사실로 만들었다. 정말 기쁘면서도 설레이고 두렵고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합격 소식에 아버지는 짧지만 굵은 말로 “고생했다”

부모님께 가장 먼저 합격 소식을 알렸고 지인과 친척들에게도 합격 소식을 전했다.
어머니는 나와 같이 소리를 지르며 기뻐해주셨고 아버지는 ‘고생했다. 축하한다.’라는 짧지만 굵은 말로 축하해주셨다.
모두가 기뻐했지만 가장 기뻐한 것은 역시'나'였다. 투덜거리며 출근을 할 수 있고, 불타는 금요일을 진정으로 즐겁게 보낼 수 있고, 직장 동료들과 점심시간에 테이크 아웃 커피를 마시며 작은 사치를 부릴 수 있고, 월급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한달간 고생한 나에게 위로의 한마디를 건낼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에 내가 자랑스러웠고 대견했다.
그동안 가장 많은 고생을 했던 나에게 작은 상을 주고 싶었다. 구직생활을 하며 마음 편하게 사먹지 못했던 치킨과 맥주를 시켜 스스로에게 축하해주었다. ‘앞으로 잘 해보자‘라는 다짐과 함께.

지금 하는 노력과 고생은 반드시 보상으로 돌아와

나는 2015년 5월, 지금까지 그 다짐을 지키고 있다. 초심이 흔들리기도 했고 좌절을 맛보기도 했으며 평일에는 10시,11시까지 야근을 하며 녹초가 되기도 했지만 나는 그 다짐을 포기하지 않았다. 구직기간동안 힘들었던 경험과 이 곳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이겨내자는 나 스스로에게 했던 다짐을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 다짐은 매일 아침 나를 출근하게 할 것이고 쌓여있는 서류를 처리할 수 있는 힘이 되어 줄 것이다.
지금도 지친 몸과 마음으로 워크넷을 보며 자신의 자리를 찾는 구직자들에게 알리고 싶다. 지금 하는 모든 노력과 고생이 기필코 큰 성과 혹은 어떤것이든 돌아온 다는 것을 전하고 싶다. 앞으로는 모두가 취업하여 취업성공을 넘어서 인생성공을 할 수 있는 멋진 사회의 일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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